최악일수록 사랑스러운 내 존재
남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여인이 있다. 급기야 유명해지기 위해 희귀 피부병에 걸린다는 황당한 계획에 착수하게 되는데, 타인의 시선에 대한 집착과 자기애가 넘치는 SNS 시대를 풍자하며 올해 칸 국제영화제가 주목한 노르웨이산 블랙코미디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다.
카페 바리스타로 일하는 시그네의 인생이 달라진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던 나른한 오후였다. 산책 중이던 개에게 물린 행인이 도움을 요청한 그날, 피투성이가 된 자신에게 쏟아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가 느낀 건,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묘한 희열이었다. 그런 시선과 관심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씻지도 않고 귀가한 시그네. 그런데 정작 남자친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사실 시그네의 남자친구는 늘 이런 식이었다. 행위예술가로 활동하면서 유난히 남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데 안달인 남자친구 토마스. 함께 있을 때마다 느껴야 했던 소외감은, 그의 전시회 뒤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그네의 말은 메아리로조차 돌아오지 않던 그때, 혹시 특정음식에 알레르기가 없는지 물으며 음식을 주문받던 레스토랑 직원에게 시그네는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한다. 거짓말이지만 그렇게라도 주목받고 싶었던 그녀. 그런데 알레르기로 주목받던 여자친구가 누구보다 불만이었던 건, 남자친구 토마스였다. 오늘의 주인공이 대화의 주도권을 뺏어가려던 찰나, 불치의 관심병은 혼신의 연기를 낳고, 시그네는 기절하는 연기를 하며 시선강탈 대결에서 남자친구에게 판정승을 거둔 시그네는 이 일로 위험한 교훈을 얻게 된다. 관심을 받으려면 아픈 게 최고라고 말이다. 그날 이후 때마침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정체불명의 피부질환 부작용으로 논란이 됐던 러시아산의 신경안정제 뉴스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피부병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문제의 약을 대량 직구하게 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피부는 멀쩡한데 졸리기만 하고, 약물부작용으로 주목받겠다는 시그네의 철없는 야망은 과다복용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내 팔뚝과 얼굴에 처음으로 발진이 생기기 시작하고, 이 피부명에 대해 먼저 관심받고 싶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남자친구였는데, 실망스럽게도 남자친구의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다음 날, 여자친구가 피부과에 다녀와도 잡지촬영에만 여념이 없는 그의 태도에 남은 약을 다량 털어 넣으며 급발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잠시 후 시그네의 극심한 부작용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토마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시그네는 위험 약물 복용사실을 끝끝내 숨기고, 검사 결과 이유를 알 수 없는 희귀 피부질환 진단을 받게 된다.
관심병 커플 시그네와 토마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관심에 죽고 사는 두 가지 자기애의 유형을 대표한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길 즐기는 시그네는 스스로를 도구처럼 이용하는 자기 파괴적 자기애의 유형인 반면, 자신이 가진 걸 전시하고 자랑하면서 시선을 즐기는 자기애의 유형이다. 말하자면 토마스에게 시그네는 자신이 전시하는 가구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사랑도 관심받기 위함일 뿐 여자친구를 전시물로 여기는 남자와, 스스로를 전시물로 전락시킨 여자의 텅빈 로맨스가 바로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가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SNS 시대 풍자 블랙 코미디
흉터도 아물기 전에 멋대로 붕대를 풀어버린 시그네. 그리고 토마스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고, 희귀 피부병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는 그녀의 SNS는 감성이란 것이 폭발하고, 더욱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 앞에는 과속 방지턱이 없었다. 기자인 친구에게 자신의 피부병을 제보하고, 공교롭게도 토마스가 화보촬영을 한 그 자리에서 인터뷰를 마친 며칠 후, 세상에서 단 한명만 걸린 희귀 질환으로 조작된 약물남용의 부작용, 그 불행의 주인공이 돼서 행복하고, 사람들이 슬퍼할수록 기쁜 시그네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시그네는 모델 제안까지 받게 된다. 이젠 스타가 되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피부병에 그치지 않고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은 그녀의 그녀의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는 등 외모마저 잠식하기 시작한다. 주목받을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은 물론이고 모든 걸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시그네. 하지만 어느새 대가를 치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운 시그네 이야기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는 사람들의 관심에 목마른 관종 커플 시그네와 토마스를 통해 현대 사회에 만연한 자기애 과잉현상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냈다. 역대급 관종인 시그네가 하는 행동이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수록 시그네를 이해하는 마음과 동시에 불편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관종이 되기를 요구하는 시대에서 시그네를 기꺼이 동정하고 연민할수도 그렇다고 마음껏 혐오하기도 힘든 것 같다.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의 풍자에 결코 웃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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